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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3. 7:30 작성된 글 

이전 블로그에 비공개 되어있던글 옮깁니다.

 

 

 

임신 14주 까지는 심한 변비가 이어졌다. 다이어리에 변을 본날은 '배변성공' 이라는 글귀를 적기 시작했는데 한달동안의 배변상태를 한꺼번에 볼수있어서 좋았다. 임신을 하니, 변을 본것을 다이어리에 체크할만큼 이렇게 중요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전에는 몰랐던 몸에변화, 그리고 작은것들을 기록함으로써 내 몸과 태아의 상태를 평균적으로 더 잘 알수있는것 같다. 이런 변화들로 인해 내가 임산부임을 되새기게 되는거겠지..

아직까지도 난 내가 임산부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임산부임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게 사실이다. 코로나 사태로 집밖을 자유롭게 나갈수 없다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이 망할놈의 바이러스가 나와 우리아이를 집안에서만 묶어두는게 아닌가 싶다가도, 그렇다 보니 덜 걷고 덜 움직이니 안정기까지 조용히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신전의 내 생활들을 뒤돌아 보면 운동도 많이했고 워낙 활동적이어서 빨리걷고 빨리 움직이고 그랬었다. 임신을 하고 나서 천천히 움직이려는게 꾀나 쉽지 않았다. 왜 천천히 움직여야 하는지 까지 이해하는데도 꾀나 시간이 걸렸지만 12주가 넘어가니 내 몸이 "천천히" 라는 말을 계속 하고있었다.

15주에 접어들때 즈음, 집콕을 제데로 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번씩 마스크를 쓰고 강아지 산책정도는 했었다. 그 이상의 거리도 남편과 함께 걸을때가 많았는데 확실히 주수가 많아지면서 내 체력도 쇠약해졌다. 마스크를 쓰며 오래 걷기란 정말 힘이 들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사람없는 잠깐의 틈을 타 마스크를 벋고 싶다가도, 이 잠시로 인해 혹시나 공기중에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지 않을까 등등 생각만 많아지고 불안감만 많아졌다.

12주 부터 14주, 15주 에 거쳐 배 통증이 엄청 심했다. 배 앓이 라고도 말할수 있는 이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생리통도 없고, 자궁쪽 문제가 있어서 산부인과를 딱히 다녀본적이 없는 나로써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아마 출산때 느끼는 진통이 이런 느낌의 몇십배 몇백배가 아닐까? 출산 전에 미리 알아두고 느껴보라고 하늘이 만들어낸 임신 과정일수도 있겠다는 재밌는 생각도 해보았다. 자궁쪽, 그러니까 생리통처럼 비슷한 느낌에 무언가가 내 아랫부분을 자극하는데 마치 콕콕 쑤시는 이 느낌은, 빨래를 쥐어짜듯 내 자궁을 누군가가 잡고 힘차게 꽈버리는 느낌이었다.

재빨리 누워야 고통이 덜하고, 이 느낌은 짧게는 1분, 길게는 3분에서 5분 간격으로 왔다가 사라지는데 중간에 뱃속에서 물컹한게 움직이는느낌, '꾸루룩' '꾸루룩' 공기가 빠지는 소리도 함께 난다. 통증이 오는 그 순간은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어 최대한 배 부위를 수축하게 만들어 통증을 잊으려 노력했다. 분명 태아가 움직이고 있는것 같았고 그게 임신초기라 자궁이 작아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과정같았다. 나중에 의사한테 물어보니 내가 마른 체형이라 남들보다 유난히 더 많은 통증을 느끼는거라며 임신과정중에 하나일뿐, 딱히 방법은 없고 그냥 먹고 바로 눕지 말라고만 말했다. 네이버도 그것보다는 잘 대답해주겠다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출산을 위해 준비를 하려면 이런 문화와 반응에 적응해야 했다.

태아가 잘 자라고 있다는걸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고통이 아닐까 싶은데 처음 시작되었을때는 20분 정도 아팠고, 그 뒤로는 30분에서 40분 정도 배앓이를 했다. 남편은 울고있는 내 옆에서 그냥 바라만 보며 배위에 손을 올려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힘이 될수가 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24시간 함께있는 남편이 내 임신과정을 하나하나 볼수있다는것도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남편 회사 가고 혼자 집에 있을때 이런 심한 배앓이를 했다면 그저 '나 배앞팠어' '너무 아파서 울었어' 이정도로 남편은 받아들였을것 같다.

내 몸에 변화, 그리고 통증, 작은것 하나까지도 남편과 함께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당당하게 나온 배를 보여주며 거실을 활보하였고, 조절할수 없는 가스가 나오면 마구 배출했다. 방귀를 부부사이에 참지 않고 마구 한다는 그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는 남편이었지만 처음과는 달리 우리 아이방구냐며 이젠 반응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나 역시 남편과 방귀를 틀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임신을 하고 나니 그게 조절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임신을해서 몸이 변해가니, 남편이 이제 여자로 보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여성들이 너무 많다. 임신이 자연스럽고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한국인에게는 서양인보다 없는게 맞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화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임산부인 우리가 먼저 너무 많은것을 오픈하지 않아서 생기는 인식이 아닐까? 미국에서는 임산부들이 일반 여성들처럼 노출을 하며 다니는것을 흔히볼수있다. 가슴이 파인옷, 드레스 심지어는 배꼽티까지. 한국에서는 그렇게 입고 다니면 엄마한테 등짝을 맞겠지? 여름이 되면 해변가에 만삭의 임산부들이 비키니를 입고 누워서 태닝을 하고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도 흔히 볼수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약 부산 해운대쯤으로 생각해보고 임산부들이 그러고 다닌다면 분명 눈쌀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사진 찍어서 인스타에 조롱하는 글이 올라올지도. 왜? 왜 그럴까? 왜 만삭의 임산부는 비키니를 입으면 안되고 노출도 남들처럼 하면 안될까?

임신을 해서 우울하다는 말을 남편한테 수시로 했다. 몸이 무거워지니 만사가 귀찮다고도 했다. 일부러 더 힘들어 하는척도 하고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남편을 시켜가며 몸을 사렸다. 요리도 가르치고 입맛이 없다며 밥을 차려 달라고도 하니 남편은 곧잘 따라주었다. 입덧때 마냥 뭐가 먹고 싶어도 코로나때문에 식당들이 문을 닫고, 그나마 배달은 되지만 그 음식들 마저 찝찝해서 먹지를 못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입맛조차 없애 버린 셈이다. 얼마 안되는 그 몇주전을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걸 남편한테 부탁해야지 생각했다. 흔한말로 '부려먹는다' 가 아닌, 남편이 당연하게 나를 잘 도와주게끔 만들기 작전?

사실 한국여성이라면 너무나 위대한 파워, 그러니까 우리 엄마들을 닮아 혼자서도 너무 잘한다. 한국여성은 남편밥도 차려줘야 하고 아이밥도 차려줘야한다. 왜 그래야 할까? 우리 언니만해도 혼자서 너무 잘해서 임신내내 형부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꼭 힘들게 해야만 하는게 아니라, 육아가 힘들다는걸 절대 모르는 형부가 그래서 태어난거다.

우리 아빠도 엄마가 우리를 키울때 육아를 하나도 안도와줬다는걸 조카가 태어나고 나서 알았다. 아빠가 조카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언니에게 '똥쌌다 기저귀갈아라' '운다 안아줘라' 하는것을 보면서 왜 저건 엄마가 다 하냐고 아빠도 해야지 라는 내 말에 언짢아 하시던 그 모습, 참 신기했다. 그런것들을 보니 생각이 많아졌고, 난 절대로 남자들이 육아는 여자의 몫이며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꼴을 보고 살지는 않을거다. 지금부터 조금씩 남편을 만들어놔야 한다. 최대한 남편을 활용하는 똑똑한 임산부가 되자. 우리모두 화이팅!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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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30. 5:57  작성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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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마른체형이라 조금만 배가 나와도 신경이 쓰이곤 했었다. 임신사실을 알게된 직후 부터 괜시리 배가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7, 9 주차때 병원을 방문 하였는데 그 사이에 벌써 5키로나 쪘다는걸 알수있었다. 똥배도 겨울이면 나오던 똥배 수준이 아니었다. 살짝 배꼽쪽 윗배가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어 언니와 동생한테 카톡으로 보내봤지만 동생은 본인의 배보다는 조금 나왔다며 웃어 넘기고, 출산경험이 있는 언니는 지금은 배 나올때 아니라며 내 배는 임신배가 아니고 똥배라고 얘기했다.

임신사실은 아직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입이 간질거려 언니와 동생에게만 먼저 얘기했었다. 따로 얘기하기 귀찮아서 카톡 단체방을 만들어 임신에 관련된 내 상태를 듣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방적으로 매일매일 카톡을 보냈다. 엄마아빠에게 남편과 함께 임신사실을 알린뒤, 그나마 조금 덜 보내게 되었지만..

자고 일어났는데 팬티 안쪽이 사타구니 사이로 끼기 시작했다. 청바지 같은 진 종류는 아예 입을수도 없었고 배가 불편했다. 아직 임부복을 사기엔 이르나, 생각날때 미리 안해두면 나중에 의무적으로 쇼핑 해야 하니, 지금 사두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미국 임부복 속옷도 괜찮지만, 한국 사이트에서 주문했다. 임부복 원피스랑 속옷등을 주문하니 약 15만원정도가 나왔다. 친정집으로 주문해 배로 받을 예정인데, 엄마는 벌써부터 이런거 시킨다며 혼을 냈다. 안정기도 아닌데 애기용품 임부용품을 시킨다고 자꾸 잔소리를 해서 괴로웠다. 내가 이것때문에 임신사실을 늦게 말하고 싶었으나, 어쩔수 없이 고스란히 카톡으로 잔소리는 들어야만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한국에서 심각해지고 있었던터라, 빨리 보내달라고 제촉했다. 결국 엄마는 언니의 아들인 손자를 보러 가시는 길에 동생과 함께 우체국에 들리셨다. 그렇게 2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 내 임부복과 미역등을 선박으로 보내주셨다. 속옷들이 불편해 지는 시기, 봄이 오는시기에 입으면 딱이겠구나..

임신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강타할 조짐이 보였다. 런던에서 오자마자 뉴스를 보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남편한테 미국도 금방 퍼질거 같다며 걱정을 했는데 남편은 그냥 다른 미국인들처럼 다른나라 이야기 쯤으로 생각했다. 2월초 중국연휴가 있어 수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방문했을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들어올것들을 걱정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그것을 알턱이 있나 싶었지만 나혼자 계속 중국에서 오는 비행기를 막아야 한다고 남편을 잡고 얘기했다. 남편은 이해할수없다는듯 내 얘기를 들었고, 내 예감은 곧 미국에서의 크나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임신7주부터 시작된 나의 입덧은 임신 11주까지 이어졌다. 처음에 입덧이라하면 무조건 변기통을 붙잡고 안을 비워야만 하는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입덧은 전혀 달랐다. 냄새가 예민해 지는건 맞다. 하지만 난 원래 부터 냄새에 극 예민한 타입이라 임신해서 냄새를 더 잘 맡는다는걸 느끼지 못했다.

하루는 침대에 누워있는데 남편이 냉장고 문을 열자 그 안에 있던 어떤 특정 냄새가 났다. 갑자기 속이 미식거렸다. 밥통에 밥을 하니 밥냄새가 그렇게 싫고, 잠을 잘때 신랑의 숨 냄새 까지도 싫었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속이 너무 비어있고 미식거려 음식을 아무것도 먹지 못할때의 기분, 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입덧은, 속이 안좋다고 안먹으면 더 미식거려, 무언가를 먹어야만 한다 생각했다. 들어가는것이 없으니 비스켓을 먹었고 중간중간 루이보스 보리차와 두유를 마셨다. 그러다 보니 입덧이 쭉 이어졌지만 음식은 꾀나 가리지 않고 먹을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1주에 가까워지면서 음식도 넘기기 힘들어지고 입맛도 없어지자, 일본마켓에서 카스테라빵을 잔뜩 사왔다. 이상하게도 카스테라는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점심 저녁을 제데로 못먹어 속이 안좋으면 아이스크림을 먹어 속을 진정시켰다. 차갑고 달콤한게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졌다.

변비는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푸룬주스도 마셔보고 바나나랑 딸기에 우유를 넣어 갈아도 마셔봤다. 효과는 한두번 이었지만 변비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다 도저히 안될거같아서 아마존으로 좌욕할것을 주문했다. 따뜻한 물을 부어 샤워후 물속에 살짝 앉았다. 그렇게 5분정도 몇번을 하고 나니 변비가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샤워할때마다 샤워기 물줄기를 최대 가운데로 모은 설정으로 바꾼뒤 개구리자세를 하고 쏘아댔다. 한번은 그 자세를 하고 샤워기로 그곳을 지지고 있는데 강아지가 급 습격하듯, 화장실문을 쳐내며 들어왔다. 화장실 앞에 큰 거울이 있는데 반사되어 보이는 남편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잽싸게 샤워커텐으로 모습을 가리며 강아지한테 '뭐야~ 이러면 어떻게 나만의 프라이버시라고" 화를 냈는데 지금 생각만 해도 너무웃기다. 밖에선 남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7주후 병원예약은 4주뒤인 11주였다. 미국은 한국과달리 4주에 한번씩 첵업을 한다. 한국은 2주에 한번씩 하는 분위기던데 사실 7주에 작은 아기를 보고난 뒤라 4주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4주에 한번씩 첵업을 하고 32주가 넘어가면서 부터는 2주에 한번, 막달엔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스케줄이 되어있었다. 7주에서 4주가 지난 11주에 병원을 다시 방문하니 사람 형태의 아이가 내 뱃속에 있었다.

미국은 간호사들이 초음파를 해준다. 의사가 해주는 한국과는 정말 다른 시스템인데, 혈압을 봐주는 간호사가 따로 있고 초음파를 해주는 간호가가 따로있다. 이 두가지를 초음파실에서 마치면, 대기 하고있다가 의사를 만나러 의사 방으로 들어간다. 의사는 초음파 해주는 간호사가 찍은 여러컷들을 확인한 후에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다. 네이버에 치면 나올법한 그런 뻔한 내용들을 듣고있지만 그래도 의사가 얘기해 주니 안심이 된다.

7주차때 임신 확인을 하고 피를 뽑지 않아 이번에 뽑는가 했더니 다음에 와서 한꺼번에 하자고 했다. 그 다음이라 함은 1주일 지난 뒤 인데, 그 이유는 12주 정도에 피를 뽑아 1차 기형아 검사를 하고 성별확인도 피검사로 인해 가능해서 였다. 11주 애매한 주수에 간 나는 태아의 목뒤 투명도를 사진으로 담지못해 12주에 또한번 가야했다. 초음파 간호사가 거의 20분 정도 태아를 움직여서 찍으려 했으나 결국 못찍어서 다시 오라고 했고, 그 덕에 아이모습을 오래 볼수 있었다.

흥미로웠던건, 태아가 안움직이자 나한테 기침을 세번 하라고 했다. 이시국에? 기침을 세번 고개를 옆으로 돌려 했더니 그때마다 태아가 붕 뜨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힘들었는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래서 알았다. 왜 임신하면 감기가 위험한지. 기침을 할때마다 태아가 붕 떴다가 내려 앉는다는걸 누가 볼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초음파 하러 갈때 마른기침을 한번 몰래 해보는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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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4. 3:39  작성된 글 

이전 블로그에 비공개 되어있던글 옮깁니다.

 

 

 

우리에게는 이틀이라는 여행이 생긴 셈이었다.

압력때문인지 배가 너무 불러왔다. 마치 풍선을 불어 놓은듯 배가 빵빵하게 느껴졌다. 입고있던 래깅스가 조여왔고 배가 아팠다. 래깅스를 팬티라인까지 내려 배를 느슨하게 해보려고 했지만 입고 있는 래깅스를 벋지 않는이상 힘들었다. 게다가 난 기내에서 아직 먹은것도 없는데 배는 부풀게 느껴지며 이상하게 배고픔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작은 샌드위치와 음료서비스를 받았다. 배가고파 그것들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니 부풀어있던 풍선에 억지로 바람을 더 넣은것처럼 배가 터질것만 같이 힘들게 불편했다. 화장실은 많이 가지 않았지만 배가 부풀어있는 이 느낌이 너무 불편해 한숨도 못자고 런던땅에 도착하고 말았다.

오후 5시가 되고 나서 호텔에 도착하고 나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또 배고픔을 느꼈다. 분명 배가 엄청 불러있는 느낌인데 왜 자꾸 배고픔을 느끼는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입덧이 시작되고 있었던것 같다. 이때 뭐라도 입에 넣지 않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쓰린, 입덧이 시작될까 두려웠다. 촌스럽지만 혹시몰라 가져온 비상용 작은 삼양라면 컵라면을 부랴부랴 뜯어 호텔방에서 단 1분만에 흡입을 했다. 비상용 한개뿐이라 남편에겐 나눠주지 못했다. 그렇게 먹고 나니 입덧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몇분도 안되서 조금만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어떻게 누웠는지도 모른체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자고 말았다.

런던에서의 일주일은 정말 모험이었다. 도착 첫날부터 가벼운 입덧이 시작되었고 틈만나면 배가 고팠다. 자꾸 인스턴트가 땡기고 한국라면이 먹고 싶었다. 도착한 첫날은 속이 안좋아 호텔방에만 있었는데 라면생각에 지하철을 타고 한인마트를 찾아갔다. 런던시내를 돌아다녀야 하는 내 여행은 어디갔을까? 한인마트를 찾아 드디어 작은 컵라면을 몇개사서 호텔로 돌아올수 있었다. 고작 2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걸으며 한인마트도 다녀왔을뿐인데 내 체력은 바닥이 났다.

호텔로 돌아오기전, 조금 쉬어야 겠단 생각에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인이 없는 차를 마셔야 하는데 죄다 카페인이 들어간 차 뿐이라, 그냥 따뜻한물에 레몬만 담아 달라고했다. 종업원은 그런거 없다며 그냥 홍차에 레몬을 띄워서 가져왔다. 한모금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옆 테이블에 영국 할머니들이 앉았다. 그래, 여기 영국이지? 조금이라도 영국을 느껴보자, 하는찬라 내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 입에서 충치냄새가 진동했다. 정말 깜짝놀랐다. 그 냄새를 맡다니. 할머니는 쉬지않고 말을 계속했는데 충치냄새에 도저히 앉아있을수가 없어 카페를 나왔다. 하필 보슬보슬 비까지 내려 가져간 우비를 뒤집어 쓴채 호텔로 돌아와야 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커녕 날씨도 별로인 런던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도착하고 다음날 시티를 다녀온 이후 매일매일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날씨, 습하고 바람부는 이 런던의 날씨는 정말 듣던데로 런던다웠다. 난 런던에서는 못살겠네 싶었고 두번다시 런던여행은 안가도 될것 같았다. 그렇게 남편이 일하는 4일 내내 여행은 커녕 호텔방에 누워 룸서비스로만 허기를 달래고 호텔근처만 돌아다녔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같은 곳이었지만 딱히 멀리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이 다가와, 드디어 여행아닌 작은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남편과 돌아다녔는데 시내를 돌아다니고 유명한곳을 보는것도 재미가 없었다. 뉴욕의 10분의1 화려함을 가진 런던이었고, 뉴욕에 살아서 그런가 모든게 비슷해 보였다. 하필, 여행 마지막날은 몸살끼가 있어 너무 괴롭기 까지 했다. 아침에 공항으로 가는 이른시간 때문에 늦게까지 잠을 못자니 그또한 더더욱 괴로웠다.

뉴욕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안, 런던 승무원에게 임신사실을 얘기하자 내 배를 보더니 임신했지만 여행오지 않았냐고 했다. 무슨 말을 저렇게 하지? 라는 생각에 미국에서 올때는 괜찮았는데 입덧이 시작되어서 힘들다고 비상구 자리를 달라고 했지만 정말 자리가 없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언급했다. 게다가 티켓 자체를 지정석으로 못해서 남편과 떨어져 앉아야 하는 최악의상황. 그럼, 붙어 앉을수 조차도 없냐 묻자, 그 또한 만석이라는 말만 했다.

어쩔수 없이 비행기에 올라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이코노미를 사서 당연한건데 내가 임산부혜택을 받으려고 했던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뉴욕에서 올때는 그냥 한번 물어본것이었고, 이번엔 진짜 비상구쪽이 필요했다. 몸살끼와 입덧까지오는 증상에 화장실까지 자주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7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생각하는 그순간, 심하게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물은 필수로 사서 들어왔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까먹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륙직전, 목이 순간적으로 심하게 건조되면서 물이 정말로 간절하게 필요했다. 승무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당황했다. 남편도 옆에 없는데 진짜 너무 서러웠다. 그러자 곧바로 폐렴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옆에 앉은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당연히 옷속으로 기침을 했지만 기침은 멈출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로나사태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다행이었지 지금 그렇게 공공 장소에서 기침했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를 살려준건 바로 사탕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던 호올스. 전날밤 몸살끼에 목감기 느낌이 있어 편의점에서 샀었던 호올스가 구세주가 되었다. 이젠 이 경험으로 나에게 사탕과 물은 필수가 될것이다. 기침을 하다 미친듯이 사탕을 까서 입에 넣으니 한결 나아진 그때의 그 기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찔끔나는 순간이었다.

 

화장실을 가며, 지나가던 남자승무원을 불렀다. 임신사실을 알리고 저기 비상구쪽에 자리가 하나 비어있는데 옮길수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승무원은 내 자리가 어딘지를 물어보며 손바닥에 내 자석번호를 적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곧 알려주겠다며 바쁘게 움직였다. 역시 여자는 남자한테 부탁하는게 더 낫다. 내 철학이다. 그렇게 10분후, 비행기가 이륙하자 남자승무원은 나에게 왔다. 그렇게 남편과 더 떨어진 곳으로, 나 혼자만 자리를 옮겼다. 비상구 쪽에는 노인이나 임산부 아이동반 사람들만 앉는거라 생각했는데 멀쩡해 보이는 60대 남성 두명이 창가쪽 비상구에 있었다. 비지니스 하는 사람들인지 7시간 내내 일얘기를 너무 큰소리로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그정도로 돈이 많으면 왜 이코노미 탔는지 정말 짜증이 났다. 그리고 반대쪽 창가쪽에는 건장해 보이는 남성들 두명이 앉아있었다. 그냥 키가 큰 건장한 남성들.. 비상구쪽엔 말그데로 비상시에 도움을 줄 건장한 남자를 앉힌다고는 들은바 있지만 그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했다. 체크인도 일찍했는데 왜 임산부인 나보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있는건지. 내가 앉은 가운데 세자리에는 키가 2미터는 되어보이는 남성과 그냥 나랑 똑같은 평범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키큰 남성은 다리가 길어 그렇다 치고, 이 여자도 임신했나? 궁금했지만 끝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7시간 동안 화장실을 10번 이상은 간것 같다. 기분이 그래서 그런가 자꾸 오줌이 마렵고 참을수가 없었다. 오줌이 많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찔끔 찝찝하게 나오는데 정말 참을수없었다. 게다가 뉴욕에서 올때랑은 다르게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정말 많이 마셔야 했고, 그 이유도 한몫했다. 틈만 나면 목 부분이 건조해지고 간지러워져서 물을 마셔야 했다. 목을 축이기도 해보고, 최대한 참아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장실을 너무 많이 가자 내옆에 키큰 남자가 다리를 자꾸 오무렸다 폈다가를 해야했다. 너무 미안했다. 다리가 기니까 쭉 피고 있었는데 나때문에 자꾸 다리를 접었다. 자는줄 알고 몰래 넘어갈라고도 해봤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리를 접었다. 부담스러웠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이해시키고 싶었지만 그게 더 이상해서 말을하지 않았다. 민망하고 챙피했지만 어쩔수없이 7시간을 버텨야 했고 엉덩이도 아프기 시작했다. 허리도 아파 정말 울고싶을때 남편이 화장실을 가다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남편 얼굴을 보니 서러움이 폭팔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있었지만 눈치없는 남편은 그걸 못보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렇게 뉴욕에 도착하니 기나긴 입국절차를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 JKF공항의 서비스는 그야말로 최악. 무엇을 기대했건 최악의 공항을 만날테니, 여행후 공항을 빠져나오는게 제일 힘든일이다. 강아지를 일주일동안 봐준 친구네집에 오후 6시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7시가 넘어서 도착하게 되었다. 저녁을 함께 하자 했지만 내 몸상태는 정말 최악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서 잘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남에집에서 거지꼴이 다된 우리 강아지를 만나니 슬펐고 빨리 집에가서 자고 싶었다. 친구들에겐 조만간 만나자고 약속한뒤, 우리는 재빨리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더럽게 씻지도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다음날 오후까지..

사람마다 정말 다르겠지만, 임신사실을 모르고도 해외여행을 가서 놀다온 사례들이 많다. 맘카페에서의 개인의 경험은 믿으면 안된다. 나는 예민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든것들이 일찍 시작되었다. 임신 사실도 예민하게 느꼈고 입덧도 빨리 시작되었다. 4주에서 5주 사이에 이런 증상들을 느끼는 케이스는 검색해서도 별로 없고 주변에서도 별로 듣지 못했다. 내가 그냥 그렇게 느껴서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반응하니 인정해야 했고, 사실이었다.

작년11월 임신전에 몸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들렸던 오피스에 예약을 했다. 런던을 다녀왔을때는 5주가 지난뒤라 7주 차에 맞춰서 예약을 했다. 임신 여부를 알고 아기집 점박이라도 보고 오려면 그때 오라고 해서 그때 맞춰 예약을 했다. 피검사로 임신인게 확실했지만, 아직 초음파를 보지 않았기때문에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7주1일이 되었을때, 병원을 방문하였고. 점보다는 조금 더 자란 올챙이 형태의 우리 아기를 볼수가 있었다.

초음파 사진은 정말 별로였다. 화소도 별로였고, 같은 모습의 사진을 5장이나 뽑아서 줬다. 그래도 이 사진한장이 어찌나 귀하던지. 병원에서는 비디오든 사진이든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이 사진이 정말 귀했다. 남들은 점 만 있는것을 처음 으로 갖고있을텐데 난 올챙이 같은 사진이 첫사진이었다. 심장소리도 기대 했지만 뛰고있는 그래프를 보여줬지 들려주지는 않았다. 한국에선 다 들려주던데, 이곳에선 태아에게 안좋다며 소리는 들려주지 않고 그래프만 보여줬다. 16주 인가 좀 지나면 소리를 들려줄거라고 했다. 모든게 정상이라는 말과 함께. 임신 사실을 정확하게 이렇게 보고나니 감격의 눈물이 났다. 신랑도 멍하니 한참동안을 화면만 바라보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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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4. 16. 6:53 작성된 글 

이전 블로그에 비공개 되어있던글 옮깁니다.

 

 

2020년 1월초, 테스트기를 통해서 임신을 확인했다.

성격이 무지 급한 나는 빨리 병원에 달려가 임신사실의 정확성을 알고 싶었으나, 미국에선 가능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한국처럼 슬리퍼 신고 언제나 집앞병원에 갈수있는, 그런 현실을 잠시나마 그리워 했다.

임신을 기다렸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꿈꿨던 사람이라면 임신을 확인하기 까지 그 몇주가 정말 괴로운 시간일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에서 임신확인이 필요했던것만은 아니었다.

1월중순에 런던으로 출장을 갈수도 있는 남편의 스케줄이 있었다. 출장을 꼭 가야 하는건 아니었지만 갈수있으면 갈수있는, 초이스가 있는 출장이었다. 나는 무조건 가라고 했고, 그 이유는 동행을 하기 위해서 였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출장때도 남편을 따라가서 남편 회사간 시간 동안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회사에서 정해준, 하루식비도 꾀나 나오는데 한날은 이런날이 있었다. 남편이 사람들과 회식하고 온다고 저녁 어떻게 혼자 먹냐고 걱정을 했다. 회사에서 지정해준 호텔이라 근처에 아무것도 없어서 룸서비스를 시켜먹으라고 했다. 아쉬운척 괜찮다고는 했지만 신나게 호텔 룸서비스랑 맥주를 시켜 집에서는 할수없는 침대에서의 만찬과 영화한편을 즐겼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드라이크리닝도, 빨래도 맘껏 맡기고,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돈 생각안하고 호텔 서비스 이용할수 있겠구나를 느껴볼수 있었다.

또 언제 영국땅을 밟아보겠어! 라는 생각에 난 무조건 남편의 출장을 따라가고 싶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는 여행은 무조건 바닷가를 가기 때문에 이런 도시 여행은 꿈을 꿀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여부는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임신이라면 런던에 못가는거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임신이 한방에 된 마당에 기쁘지 않단 말인가? 게다가 여행에서의 술은 빠질수 없는 나의 낛인데.. 그 마저도 임신이면 즐길수 없단 말인가? 이런 나의 철없는 생각은 멈출수가 없었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미국, 뉴욕. 모든사람이 가보고 싶어하는 도시 '뉴욕' 이지만 나는 런던을 가보고싶단 말이다!!

다음날, 도저히 안될것 같아서 맨해튼에 있는 한국의사가 있는 병원을 검색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뻔한정보들만 나와, 닥터앱을 다운받아 그곳에서 지역과 산부인과 의사를 검색했다. 두세번 정도 이용한 기억이 있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으며 쉽고 빠르게 닥터오피스를 찾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Zocdoc 이라는 앱인데 후기도 볼수있다. 보험카드가 있다면 사진으로 미리 찍어서 보험혜택이 되는지 조차도 알수있고, 보험이 되는 병원만 추려서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늘 전화로 보험이 되는지 여부를 재 확인한 후에 방문 했었다.

그렇게 테스트 두줄을 보고 난 3일뒤 나는 맨해튼에 있는 한 산부인과에 예약을 했다. 뉴욕에 10년을 살았는데 이런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뻔하고 매일 지나다니는 건물 안에 산부인과 오피스가 있었다. 작은 오피스에 의자 몇개, 간호사들이 진료를 예약받고 있었다. 병원이라는 느낌보단 그냥 회사 사무실 같은 이곳은 있는 동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공간이나 장소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고 그 느낌이 정말 잘 맞는데, 시작이 불안했다. 하지만 큰 수술이나 출산 같이 큰병원을 갈일이 아니라면 모든 진료는 오피스 방문이니 그냥 그려려니 했다. 임산부는 한명도 없고 전부 젊은 여자들만 있었다. 산부인과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류를 작성하고 내 차례를 기다리다 한국인 닥터를 만났다. 나이는 내 나이정도 되어 보이는, 아니면 나보다는 좀 어려 보이는 30대 의사인데, 의사보다는 한국에서의 인턴? 느낌이 좀 들었다. 한국말이 되다보니 쓸때 없는 말을 많이 하게 되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인 의사는 좀 별로다. 이 의사는 나에게 뻔한 질문들, 술은 마시냐 담배는 하냐 등등 기본적인 사항들을 기록 하였다. 원래 이런것들은 닥터오피스 가면 간호사가 하는 것들인데 여기는 의사가 전부 케어하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장 황당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원하는 임신이냐는 것이었다. 순간 5초정도 황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를 날라리 그 이상으로 봤는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는것인가 의외였다. 침착하게 마음을 먹고, 웃으면서 왜 그런질문을 하냐고 하자, 의사는 당황해 했다. 역시 내가 생각한 데로 이 오피스는 낙태를 결심하러 온 젊은 여자들도 꾀 있다는걸 짐작할수 있었다.

의사가 기록을 마치고 나가며 초음파실로 나를 안내했다. 당연히 한국처럼 의사가 들어와서 초음파를 해줄줄 알았는데 잠시후 키크고 덩치큰 흑인여성이 들어와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체 랩을 하듯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렇게 초음파 기계를 끌고와서 설치를 하며 초음파를 준비했다. 나는 긴장을 좀 풀고 싶어서 웃었는데 그런 내 웃는얼굴 조차 외면했다. 미리 예고도 없이 질초음파를 시작하는데 손놀림이 너무 빨랐다. 차가운 젤을 듬뿍묻혀 내 질 속으로 갑자기 기계를 넣는데 기분좋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기분이 너무 나빴다. 차갑다고 하면서 혹시나 기분나쁠까봐 살짝 애매하게 웃었는데, 역시 미국에서는 쓸때없이 웃으면 오해를 받는다. 이 흑인 여자는 나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 아니라면서 나는 내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도데체 똥인지 된장인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짜증이 났지만 내 질을 쑤시고 있는 이 여자에게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 여자는 나를 뭘로 보고, 아니 내가 지금 질초음파 하면서 뭘 느끼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기분나쁜 질초음파를 하면서 뭔가를 입력하는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아기집이 보이지 않는다며, 너무 일찍 왔다고 하고, 급하게 초음파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도데체 초음파 기계는 왜 들고 들어왔다가 들고 나가는지 정말 이상한 병원이었다. 땡큐라고 말하고 일어나려고 하자, 갑자기 놀래면서 본인이 나가면 일어나서 옷을 입으라고 매너를 지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음파 기계를 끌고 사라졌다. 나는 그냥 상체만 일어설라고 했던 것이었는데 이 여자는 덮고있던 것을 치우고, 아랫도리가 없는 상태로 내가 아예 의자에서 내려올줄 알았나? 하....

진짜 너무 황당하고 재수없는 흑인여자를 만나고 난뒤 몇분이 되지 않아 젊은 한국인 의사가 들어왔다. 소변검사를 했는데 선이 너무 흐리다며 진짜 두줄을 본게 맞냐고 물었다. 이건 또 무슨소리인가,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의사는 너무 일찍 온거 같다며 초음파로 보지 못했으니 피검사를 통해 임신여부를 알수있다고 했다. 그렇게 피를 뽑고 기분나쁜 250불을 냈다. 보험커버가 분명히 된다고 해놓고 피검사 같은 경우는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며 왜 250불을 내야하는지에 대한 온갖 듣기 복잡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아 카드로 결제를 하고 그 오피스를 떠났다.

그렇게 이틀후, 이메일이 왔다. 피검사 결과였다. 봐도 봐도 죄다 의학 영어여서 뭐가 뭔지 모르는 결과였다. 도데체 어디를 보고 임신여부인지를 알수있다는 건지. 그냥 서류만 첨부해서 보내준 병원 의사가 야속했다. 맘카페에 일정 부분을 올려봤더니 임신수치 넘버가 임신인거 같다고들 했다. 맘카페에 사진을 올릴때 의사한테 답변으로 임신이냐고 한국말로 써서 보냈었다. 맘카페에 답글들이 달릴때, 의사 역시 답변으로 임신이어야만 나오는 수치라며 임신 같다고 (?) 축하한다는 답변이 왔다.

초음파에서 점도 보이지 않던 4주의 임신...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을까.. 그렇게 나는 2020년 1월초... 초음파로 본게 없어 조금은 걱정이 되던 임신사실을 확인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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