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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4. 3:39  작성된 글 

이전 블로그에 비공개 되어있던글 옮깁니다.

 

 

 

우리에게는 이틀이라는 여행이 생긴 셈이었다.

압력때문인지 배가 너무 불러왔다. 마치 풍선을 불어 놓은듯 배가 빵빵하게 느껴졌다. 입고있던 래깅스가 조여왔고 배가 아팠다. 래깅스를 팬티라인까지 내려 배를 느슨하게 해보려고 했지만 입고 있는 래깅스를 벋지 않는이상 힘들었다. 게다가 난 기내에서 아직 먹은것도 없는데 배는 부풀게 느껴지며 이상하게 배고픔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작은 샌드위치와 음료서비스를 받았다. 배가고파 그것들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니 부풀어있던 풍선에 억지로 바람을 더 넣은것처럼 배가 터질것만 같이 힘들게 불편했다. 화장실은 많이 가지 않았지만 배가 부풀어있는 이 느낌이 너무 불편해 한숨도 못자고 런던땅에 도착하고 말았다.

오후 5시가 되고 나서 호텔에 도착하고 나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또 배고픔을 느꼈다. 분명 배가 엄청 불러있는 느낌인데 왜 자꾸 배고픔을 느끼는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입덧이 시작되고 있었던것 같다. 이때 뭐라도 입에 넣지 않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쓰린, 입덧이 시작될까 두려웠다. 촌스럽지만 혹시몰라 가져온 비상용 작은 삼양라면 컵라면을 부랴부랴 뜯어 호텔방에서 단 1분만에 흡입을 했다. 비상용 한개뿐이라 남편에겐 나눠주지 못했다. 그렇게 먹고 나니 입덧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몇분도 안되서 조금만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어떻게 누웠는지도 모른체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자고 말았다.

런던에서의 일주일은 정말 모험이었다. 도착 첫날부터 가벼운 입덧이 시작되었고 틈만나면 배가 고팠다. 자꾸 인스턴트가 땡기고 한국라면이 먹고 싶었다. 도착한 첫날은 속이 안좋아 호텔방에만 있었는데 라면생각에 지하철을 타고 한인마트를 찾아갔다. 런던시내를 돌아다녀야 하는 내 여행은 어디갔을까? 한인마트를 찾아 드디어 작은 컵라면을 몇개사서 호텔로 돌아올수 있었다. 고작 2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걸으며 한인마트도 다녀왔을뿐인데 내 체력은 바닥이 났다.

호텔로 돌아오기전, 조금 쉬어야 겠단 생각에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인이 없는 차를 마셔야 하는데 죄다 카페인이 들어간 차 뿐이라, 그냥 따뜻한물에 레몬만 담아 달라고했다. 종업원은 그런거 없다며 그냥 홍차에 레몬을 띄워서 가져왔다. 한모금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옆 테이블에 영국 할머니들이 앉았다. 그래, 여기 영국이지? 조금이라도 영국을 느껴보자, 하는찬라 내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 입에서 충치냄새가 진동했다. 정말 깜짝놀랐다. 그 냄새를 맡다니. 할머니는 쉬지않고 말을 계속했는데 충치냄새에 도저히 앉아있을수가 없어 카페를 나왔다. 하필 보슬보슬 비까지 내려 가져간 우비를 뒤집어 쓴채 호텔로 돌아와야 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커녕 날씨도 별로인 런던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도착하고 다음날 시티를 다녀온 이후 매일매일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날씨, 습하고 바람부는 이 런던의 날씨는 정말 듣던데로 런던다웠다. 난 런던에서는 못살겠네 싶었고 두번다시 런던여행은 안가도 될것 같았다. 그렇게 남편이 일하는 4일 내내 여행은 커녕 호텔방에 누워 룸서비스로만 허기를 달래고 호텔근처만 돌아다녔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같은 곳이었지만 딱히 멀리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이 다가와, 드디어 여행아닌 작은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남편과 돌아다녔는데 시내를 돌아다니고 유명한곳을 보는것도 재미가 없었다. 뉴욕의 10분의1 화려함을 가진 런던이었고, 뉴욕에 살아서 그런가 모든게 비슷해 보였다. 하필, 여행 마지막날은 몸살끼가 있어 너무 괴롭기 까지 했다. 아침에 공항으로 가는 이른시간 때문에 늦게까지 잠을 못자니 그또한 더더욱 괴로웠다.

뉴욕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안, 런던 승무원에게 임신사실을 얘기하자 내 배를 보더니 임신했지만 여행오지 않았냐고 했다. 무슨 말을 저렇게 하지? 라는 생각에 미국에서 올때는 괜찮았는데 입덧이 시작되어서 힘들다고 비상구 자리를 달라고 했지만 정말 자리가 없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언급했다. 게다가 티켓 자체를 지정석으로 못해서 남편과 떨어져 앉아야 하는 최악의상황. 그럼, 붙어 앉을수 조차도 없냐 묻자, 그 또한 만석이라는 말만 했다.

어쩔수 없이 비행기에 올라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이코노미를 사서 당연한건데 내가 임산부혜택을 받으려고 했던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뉴욕에서 올때는 그냥 한번 물어본것이었고, 이번엔 진짜 비상구쪽이 필요했다. 몸살끼와 입덧까지오는 증상에 화장실까지 자주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7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생각하는 그순간, 심하게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물은 필수로 사서 들어왔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까먹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륙직전, 목이 순간적으로 심하게 건조되면서 물이 정말로 간절하게 필요했다. 승무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당황했다. 남편도 옆에 없는데 진짜 너무 서러웠다. 그러자 곧바로 폐렴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옆에 앉은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당연히 옷속으로 기침을 했지만 기침은 멈출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로나사태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다행이었지 지금 그렇게 공공 장소에서 기침했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를 살려준건 바로 사탕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던 호올스. 전날밤 몸살끼에 목감기 느낌이 있어 편의점에서 샀었던 호올스가 구세주가 되었다. 이젠 이 경험으로 나에게 사탕과 물은 필수가 될것이다. 기침을 하다 미친듯이 사탕을 까서 입에 넣으니 한결 나아진 그때의 그 기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찔끔나는 순간이었다.

 

화장실을 가며, 지나가던 남자승무원을 불렀다. 임신사실을 알리고 저기 비상구쪽에 자리가 하나 비어있는데 옮길수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승무원은 내 자리가 어딘지를 물어보며 손바닥에 내 자석번호를 적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곧 알려주겠다며 바쁘게 움직였다. 역시 여자는 남자한테 부탁하는게 더 낫다. 내 철학이다. 그렇게 10분후, 비행기가 이륙하자 남자승무원은 나에게 왔다. 그렇게 남편과 더 떨어진 곳으로, 나 혼자만 자리를 옮겼다. 비상구 쪽에는 노인이나 임산부 아이동반 사람들만 앉는거라 생각했는데 멀쩡해 보이는 60대 남성 두명이 창가쪽 비상구에 있었다. 비지니스 하는 사람들인지 7시간 내내 일얘기를 너무 큰소리로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그정도로 돈이 많으면 왜 이코노미 탔는지 정말 짜증이 났다. 그리고 반대쪽 창가쪽에는 건장해 보이는 남성들 두명이 앉아있었다. 그냥 키가 큰 건장한 남성들.. 비상구쪽엔 말그데로 비상시에 도움을 줄 건장한 남자를 앉힌다고는 들은바 있지만 그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했다. 체크인도 일찍했는데 왜 임산부인 나보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있는건지. 내가 앉은 가운데 세자리에는 키가 2미터는 되어보이는 남성과 그냥 나랑 똑같은 평범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키큰 남성은 다리가 길어 그렇다 치고, 이 여자도 임신했나? 궁금했지만 끝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7시간 동안 화장실을 10번 이상은 간것 같다. 기분이 그래서 그런가 자꾸 오줌이 마렵고 참을수가 없었다. 오줌이 많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찔끔 찝찝하게 나오는데 정말 참을수없었다. 게다가 뉴욕에서 올때랑은 다르게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정말 많이 마셔야 했고, 그 이유도 한몫했다. 틈만 나면 목 부분이 건조해지고 간지러워져서 물을 마셔야 했다. 목을 축이기도 해보고, 최대한 참아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장실을 너무 많이 가자 내옆에 키큰 남자가 다리를 자꾸 오무렸다 폈다가를 해야했다. 너무 미안했다. 다리가 기니까 쭉 피고 있었는데 나때문에 자꾸 다리를 접었다. 자는줄 알고 몰래 넘어갈라고도 해봤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리를 접었다. 부담스러웠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이해시키고 싶었지만 그게 더 이상해서 말을하지 않았다. 민망하고 챙피했지만 어쩔수없이 7시간을 버텨야 했고 엉덩이도 아프기 시작했다. 허리도 아파 정말 울고싶을때 남편이 화장실을 가다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남편 얼굴을 보니 서러움이 폭팔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있었지만 눈치없는 남편은 그걸 못보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렇게 뉴욕에 도착하니 기나긴 입국절차를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 JKF공항의 서비스는 그야말로 최악. 무엇을 기대했건 최악의 공항을 만날테니, 여행후 공항을 빠져나오는게 제일 힘든일이다. 강아지를 일주일동안 봐준 친구네집에 오후 6시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7시가 넘어서 도착하게 되었다. 저녁을 함께 하자 했지만 내 몸상태는 정말 최악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서 잘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남에집에서 거지꼴이 다된 우리 강아지를 만나니 슬펐고 빨리 집에가서 자고 싶었다. 친구들에겐 조만간 만나자고 약속한뒤, 우리는 재빨리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더럽게 씻지도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다음날 오후까지..

사람마다 정말 다르겠지만, 임신사실을 모르고도 해외여행을 가서 놀다온 사례들이 많다. 맘카페에서의 개인의 경험은 믿으면 안된다. 나는 예민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든것들이 일찍 시작되었다. 임신 사실도 예민하게 느꼈고 입덧도 빨리 시작되었다. 4주에서 5주 사이에 이런 증상들을 느끼는 케이스는 검색해서도 별로 없고 주변에서도 별로 듣지 못했다. 내가 그냥 그렇게 느껴서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반응하니 인정해야 했고, 사실이었다.

작년11월 임신전에 몸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들렸던 오피스에 예약을 했다. 런던을 다녀왔을때는 5주가 지난뒤라 7주 차에 맞춰서 예약을 했다. 임신 여부를 알고 아기집 점박이라도 보고 오려면 그때 오라고 해서 그때 맞춰 예약을 했다. 피검사로 임신인게 확실했지만, 아직 초음파를 보지 않았기때문에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7주1일이 되었을때, 병원을 방문하였고. 점보다는 조금 더 자란 올챙이 형태의 우리 아기를 볼수가 있었다.

초음파 사진은 정말 별로였다. 화소도 별로였고, 같은 모습의 사진을 5장이나 뽑아서 줬다. 그래도 이 사진한장이 어찌나 귀하던지. 병원에서는 비디오든 사진이든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이 사진이 정말 귀했다. 남들은 점 만 있는것을 처음 으로 갖고있을텐데 난 올챙이 같은 사진이 첫사진이었다. 심장소리도 기대 했지만 뛰고있는 그래프를 보여줬지 들려주지는 않았다. 한국에선 다 들려주던데, 이곳에선 태아에게 안좋다며 소리는 들려주지 않고 그래프만 보여줬다. 16주 인가 좀 지나면 소리를 들려줄거라고 했다. 모든게 정상이라는 말과 함께. 임신 사실을 정확하게 이렇게 보고나니 감격의 눈물이 났다. 신랑도 멍하니 한참동안을 화면만 바라보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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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4. 16. 6:53 작성된 글 

이전 블로그에 비공개 되어있던글 옮깁니다.

 

 

2020년 1월초, 테스트기를 통해서 임신을 확인했다.

성격이 무지 급한 나는 빨리 병원에 달려가 임신사실의 정확성을 알고 싶었으나, 미국에선 가능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한국처럼 슬리퍼 신고 언제나 집앞병원에 갈수있는, 그런 현실을 잠시나마 그리워 했다.

임신을 기다렸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꿈꿨던 사람이라면 임신을 확인하기 까지 그 몇주가 정말 괴로운 시간일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에서 임신확인이 필요했던것만은 아니었다.

1월중순에 런던으로 출장을 갈수도 있는 남편의 스케줄이 있었다. 출장을 꼭 가야 하는건 아니었지만 갈수있으면 갈수있는, 초이스가 있는 출장이었다. 나는 무조건 가라고 했고, 그 이유는 동행을 하기 위해서 였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출장때도 남편을 따라가서 남편 회사간 시간 동안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회사에서 정해준, 하루식비도 꾀나 나오는데 한날은 이런날이 있었다. 남편이 사람들과 회식하고 온다고 저녁 어떻게 혼자 먹냐고 걱정을 했다. 회사에서 지정해준 호텔이라 근처에 아무것도 없어서 룸서비스를 시켜먹으라고 했다. 아쉬운척 괜찮다고는 했지만 신나게 호텔 룸서비스랑 맥주를 시켜 집에서는 할수없는 침대에서의 만찬과 영화한편을 즐겼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드라이크리닝도, 빨래도 맘껏 맡기고,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돈 생각안하고 호텔 서비스 이용할수 있겠구나를 느껴볼수 있었다.

또 언제 영국땅을 밟아보겠어! 라는 생각에 난 무조건 남편의 출장을 따라가고 싶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는 여행은 무조건 바닷가를 가기 때문에 이런 도시 여행은 꿈을 꿀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여부는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임신이라면 런던에 못가는거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임신이 한방에 된 마당에 기쁘지 않단 말인가? 게다가 여행에서의 술은 빠질수 없는 나의 낛인데.. 그 마저도 임신이면 즐길수 없단 말인가? 이런 나의 철없는 생각은 멈출수가 없었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미국, 뉴욕. 모든사람이 가보고 싶어하는 도시 '뉴욕' 이지만 나는 런던을 가보고싶단 말이다!!

다음날, 도저히 안될것 같아서 맨해튼에 있는 한국의사가 있는 병원을 검색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뻔한정보들만 나와, 닥터앱을 다운받아 그곳에서 지역과 산부인과 의사를 검색했다. 두세번 정도 이용한 기억이 있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으며 쉽고 빠르게 닥터오피스를 찾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Zocdoc 이라는 앱인데 후기도 볼수있다. 보험카드가 있다면 사진으로 미리 찍어서 보험혜택이 되는지 조차도 알수있고, 보험이 되는 병원만 추려서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늘 전화로 보험이 되는지 여부를 재 확인한 후에 방문 했었다.

그렇게 테스트 두줄을 보고 난 3일뒤 나는 맨해튼에 있는 한 산부인과에 예약을 했다. 뉴욕에 10년을 살았는데 이런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뻔하고 매일 지나다니는 건물 안에 산부인과 오피스가 있었다. 작은 오피스에 의자 몇개, 간호사들이 진료를 예약받고 있었다. 병원이라는 느낌보단 그냥 회사 사무실 같은 이곳은 있는 동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공간이나 장소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고 그 느낌이 정말 잘 맞는데, 시작이 불안했다. 하지만 큰 수술이나 출산 같이 큰병원을 갈일이 아니라면 모든 진료는 오피스 방문이니 그냥 그려려니 했다. 임산부는 한명도 없고 전부 젊은 여자들만 있었다. 산부인과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류를 작성하고 내 차례를 기다리다 한국인 닥터를 만났다. 나이는 내 나이정도 되어 보이는, 아니면 나보다는 좀 어려 보이는 30대 의사인데, 의사보다는 한국에서의 인턴? 느낌이 좀 들었다. 한국말이 되다보니 쓸때 없는 말을 많이 하게 되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인 의사는 좀 별로다. 이 의사는 나에게 뻔한 질문들, 술은 마시냐 담배는 하냐 등등 기본적인 사항들을 기록 하였다. 원래 이런것들은 닥터오피스 가면 간호사가 하는 것들인데 여기는 의사가 전부 케어하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장 황당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원하는 임신이냐는 것이었다. 순간 5초정도 황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를 날라리 그 이상으로 봤는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는것인가 의외였다. 침착하게 마음을 먹고, 웃으면서 왜 그런질문을 하냐고 하자, 의사는 당황해 했다. 역시 내가 생각한 데로 이 오피스는 낙태를 결심하러 온 젊은 여자들도 꾀 있다는걸 짐작할수 있었다.

의사가 기록을 마치고 나가며 초음파실로 나를 안내했다. 당연히 한국처럼 의사가 들어와서 초음파를 해줄줄 알았는데 잠시후 키크고 덩치큰 흑인여성이 들어와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체 랩을 하듯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렇게 초음파 기계를 끌고와서 설치를 하며 초음파를 준비했다. 나는 긴장을 좀 풀고 싶어서 웃었는데 그런 내 웃는얼굴 조차 외면했다. 미리 예고도 없이 질초음파를 시작하는데 손놀림이 너무 빨랐다. 차가운 젤을 듬뿍묻혀 내 질 속으로 갑자기 기계를 넣는데 기분좋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기분이 너무 나빴다. 차갑다고 하면서 혹시나 기분나쁠까봐 살짝 애매하게 웃었는데, 역시 미국에서는 쓸때없이 웃으면 오해를 받는다. 이 흑인 여자는 나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 아니라면서 나는 내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도데체 똥인지 된장인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짜증이 났지만 내 질을 쑤시고 있는 이 여자에게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 여자는 나를 뭘로 보고, 아니 내가 지금 질초음파 하면서 뭘 느끼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기분나쁜 질초음파를 하면서 뭔가를 입력하는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아기집이 보이지 않는다며, 너무 일찍 왔다고 하고, 급하게 초음파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도데체 초음파 기계는 왜 들고 들어왔다가 들고 나가는지 정말 이상한 병원이었다. 땡큐라고 말하고 일어나려고 하자, 갑자기 놀래면서 본인이 나가면 일어나서 옷을 입으라고 매너를 지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음파 기계를 끌고 사라졌다. 나는 그냥 상체만 일어설라고 했던 것이었는데 이 여자는 덮고있던 것을 치우고, 아랫도리가 없는 상태로 내가 아예 의자에서 내려올줄 알았나? 하....

진짜 너무 황당하고 재수없는 흑인여자를 만나고 난뒤 몇분이 되지 않아 젊은 한국인 의사가 들어왔다. 소변검사를 했는데 선이 너무 흐리다며 진짜 두줄을 본게 맞냐고 물었다. 이건 또 무슨소리인가,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의사는 너무 일찍 온거 같다며 초음파로 보지 못했으니 피검사를 통해 임신여부를 알수있다고 했다. 그렇게 피를 뽑고 기분나쁜 250불을 냈다. 보험커버가 분명히 된다고 해놓고 피검사 같은 경우는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며 왜 250불을 내야하는지에 대한 온갖 듣기 복잡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아 카드로 결제를 하고 그 오피스를 떠났다.

그렇게 이틀후, 이메일이 왔다. 피검사 결과였다. 봐도 봐도 죄다 의학 영어여서 뭐가 뭔지 모르는 결과였다. 도데체 어디를 보고 임신여부인지를 알수있다는 건지. 그냥 서류만 첨부해서 보내준 병원 의사가 야속했다. 맘카페에 일정 부분을 올려봤더니 임신수치 넘버가 임신인거 같다고들 했다. 맘카페에 사진을 올릴때 의사한테 답변으로 임신이냐고 한국말로 써서 보냈었다. 맘카페에 답글들이 달릴때, 의사 역시 답변으로 임신이어야만 나오는 수치라며 임신 같다고 (?) 축하한다는 답변이 왔다.

초음파에서 점도 보이지 않던 4주의 임신...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을까.. 그렇게 나는 2020년 1월초... 초음파로 본게 없어 조금은 걱정이 되던 임신사실을 확인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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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4. 11. 9:04  작성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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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연말.

크리스마스를 조금 특별하게 보내고자, 캐나다 스키장을 예약했다. 강아지 때문에 차로 이동하는 여행을 계획하던중, 캐나다 스키장 강아지동반 리조트를 찾아냈다. 23일부터 25일 까지 스키장 리조트에 3일을 예약하고, 24일과 25일 신나게 스노우보딩을 즐겼다. 24일은 강아지 때문에 오후만 탔었는데 25일은 강아지가 혼자 잘 있어줘서 하루종일을 탈수 있었다. 여행에서 사용하려고 집에있는 보안캠을 가지고 갔었는데 연결이 안되니 너무 불안했다. 난 호텔방에 강아지 혼자 놔두고 하루종일 스노우보드 타러 못간다며 울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똑똑한 신랑의 아이디어로 유튜브 라이브캠을 키고 스키장으로 향했다. 곤돌라를 올라가면서, 리프트 한번 내려올때마다 우리 강아지 잘 있는지 확인이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잠만 자던 우리 댕댕이는 고맙게 한번도 안짖고 잘 있어주었다. 강아지와 여행을 다니기 위한 끈임없는 나의 훈련이 성과를 발휘하는 날이었다. 아이가 생기면 둘이서 스노우보드도 못탈텐데,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실컨 즐기라며 남편에게 농담을 했다.

26일 체크아웃을 하고 우리는 년초까지 캐나다의 시골마을을 여행하기로 했었다. 그렇게 2020년 1월1일을 캐나다에서 보내고 5일 이전에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했었다. 남편의 휴가에 맞춰 움직인 계획이었어서 급 결정된 휴가 였고, 그러다보니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계획으로 여행을 가자며 천하 태평한 남편과는 달리 그동안의 고생을 생각해 밤을 새며 스키장리조트 3일을 힘들게 예약했다. 그때부터 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2019년을 좋게 마무리 하자는 마음으로 참고 또 참았다. 결국 스키장 리조트를 체크아웃 하던날, 내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아 큰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렇게 남편의 무계획 여행은 산산조각이 났다.

늘 그랬듯이 심하게 싸우고 우리는 다시 미국령으로 돌아왔다. 차안에서 어찌나 싸웠는지 집에 도착하면 정말 헤어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런놈과 임신을 생각하다니 역시 내가 잘못 생각했다며 크게 후회했다. 몇년전부터 크게 싸울때 마다 헤어지네 마네 남편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지겹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보고 있자니 남편이 필요없게 느껴졌다. 새해가 밝아오면 짐을 싸서 나가야지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차안에서 싸우고 나니 머리가 아팠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두통이 너무 심하게 왔다. 머리아프다며 울기까지 하니 남편은 '에드빌' (두통약) 을 먹으라고 했다. 병주고 약주냐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났다. 이때 에드빌을 먹었더라면... 갑자기 온몸이 춥게 느껴졌다. 스노우보드를 너무 열정적으로 타고 난 다음에 긴장이 풀려 울기까지 하니 몸살이 왔나보다. 그렇게 남편은 끝까지 싸움을 키우며, 결국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어버렸다.

집에오고 나니, 더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길게 만들어서 간 여정인데 싸웠다고 이렇게 다시 집에 오다니, 너무나 화가 났다. 몸살끼도 있고, 머리도 아프고 하니 연말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다짐하에 연말 계획은 하지도 않았고 거의 5일동안 집밖에 나가지도, 남편과 말을 하지도 않았다.

밥도 따로 먹고, 침대에서 아이패드 끼고 시체처럼 지냈다. 정말 헤어질 마음에 오만생각을 다 하며 나 나름 헤어질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들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그런가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 몸살기운은 왔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누워만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며, 결국 어이없는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를 맞이하니 더더욱 서러웠다. 남편은 새해아침부터 운동을 하러 나갔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괜히 화가났다. 왜이렇게 화가나고 짜증이 나는지. 하지만 화도 잠시, 갑자기 드는 생각이.. 요 며칠 배변을 보지 못했다는걸 알았다. 아침만 먹으면 쾌변을 보는 나에게 며칠동안의 변비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집어 보니, 스키장 체크아웃때 부터 였나.. 거의 5일정도 배변을 보지 못한것이었다.

네이버에 변비관련 검색을 하는데 임신관련 글들이 뜨기 시작했다. 임신의 가능성은 단 1도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설마... 하며 폭풍검색과 마지막 생리일을 체크 하기 시작했다. 아니, 마지막 관계일이 언제였더라?

캐나다 스키장 리조트에 가기전, 하루는 몬트리올에서 잤다. 여행 첫날이라 서로 기분이 좋았었다.

원치않은, 계획아닌 임신이 싫어 나는 늘 콘돔을 원했었다. 하지만 2020년부턴 임신계획을 할거라 그냥 콘돔없이 하루 관계를 했었다.

관계후 그 다음날, 스키장으로 이동해서 3일내내 신나게 스노우보드 타고 술도 마시고 그랬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크게 싸우고난뒤 집으로 와 거의 일주일을 침대와 누워 생활한게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언니 말에 의하면, 그래서 그때 배란이 된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관계후 약 5일이 지난뒤 인데.. 배란이 5일뒤에 까지 된다는 말은 좀 이상하다.

임신일까?

밤 10시에 폭풍 검색을 하다 도저히 궁금해 배란일테스트기에 딸려온 임테기를 한개 뜯었다. 임신 여부는 14일인 2주정도 있어야 알수 있다고 했는데, 당시엔 12일정도 되었던 날이었다. 게다가 아침소변도 아니었고 밤 10시 소변. 정말 황당하지만 임신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나 해볼만한 것들이 아닐까.

소변테스트를 하고 10분정도 기다리자 한줄이 선명하게 나왔다. 혼자서 하하하 웃으며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혹시나 해서 사둔 얼리 임테기를 뜯었다. 얼리 임테기는 일주일 열흘 사이에 도 임신이면 두줄을 볼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두길 정말 잘했다. 나처럼 궁금한걸 못참는 사람들에겐 필수다. 아침 소변을 참고 참은뒤 테스트기를 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오전 11시 정도 였을까.. 얼리 임테기를 뜯어서 테스트를 하고 일반 임테기도 또 해봤다. 그렇게 그 두가지를 어제 밤 10시에 해본 임테기 옆에 놔두었다.

그런데 어제 해논 임테기가!

어제 해논 임테기에 희미한 두줄이 떠 있었다. 분명 저녁에 하고 봤을땐 한줄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옆에 미세한 두줄이 보였다.

 

 

 

전날 저녁 소변으로 한 임테기 위에 사진.

다음날 아침소변으로 한 임테기 아래사진.

황당해 하던 찬라, 얼리 임테기에 두줄이 떴다.

 

얼리 임테기 위에사진

시간이 지나자 더 진해진 일반 임테기 아래사진.

아마존에서 주문한 제품들이 무용지물이 되던순간..

뭐 어때, 이렇게 좋은일이 생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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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4. 11. 7:56 작성된 글 

이전 블로그에 비공개 되어있던글 옮깁니다.

 

 

 

 

내 나이 곧 마흔..

한국나이로 치면 마흔이 코앞이라 어자피 낳을 아이면 이제는 계획을 세워야 싶었다. 사실 미국에서 살다보면 나이를 잊고 산다. 한국처럼 문화가 결혼을 왜 안하냐 애는 왜 안낳냐가 아니라, 이곳에선 그저 온전히 "나 "의 모습으로 살아 가기 때문이다.

작년에 우연히 유튜브로 뒤늦게 한국예능을 보다가 "아내의맛" 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연예인 함소원과 진화 부부가 나오는걸 봤는데 함소원이 살이 너무 쪄 보였다. 볼에 뭘 저렇게 넣었을까? 하고 유심히 보니, 그녀는 임신을 한것 이었다. 불과 얼마전 까지만해도 18년 차이나는 남편과 결혼한다 기사가 났었는데 임신을 했다고 하니 신기했다. 내가 뒤늦게 그 영상을 보고 있었던 시점에는 이미 그들의 아이는 돌이 되었을때 쯤 이었을거다.

그냥 그렇게 스쳐지나가듯 '그렇구나' 하고 말았는데 어느날 또 유튜브를 보던중 함소원 출산장면이 나왔다. 내가 원해서도 아니었고 추천영상들을 보던중 함소원에 얼굴이 괴로워하는 썸네일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클릭을 하여 그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짧은 영상하나가 내 모든 생각을 바꿔 놓았다.

'나이를 많이 먹고 애를 낳으면 저렇게 힘들겠구나' 싶었다. 그리곤 여러생각들이 교차했다. 어자피 안낳을거면 모르겠는데 나는 늘 아이는 꼭 있어야 겠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마흔이 훌쩍넘은 나이에 아이없이 사는 여자들을 많이 봤었는데 아무리 돈이 많고 능력이 좋아 보여도 한편으론 뭔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부러움에 대상이 아니라,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더 간절했었다.

100세 시대에 출산을 할수있는 기간이 빠르면 스무살부터 늦게는 마흔이라고 가정했을때, 우리에게는 20년동안의 기회가 있다. 나는 그 20년중에 90%를 실컨 놀며 생각없이 살았다. 사랑하는 짝을 못만나서 어쩔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그 기회가 50% 넘어가던때, 우리 남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상황들로 계획을 세울수 없었다. 절대 얼떨결에 임신을 해서 "나 임신했어" 라고 하기가 죽어도 싫었다. 같이 계획하고 준비하고 기다리고 싶었다. 그런 쓸때없는 나의 욕심때문에 나는 막차를 타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이제 막차를 탈까 말까 고민하던중, 연예인 함소원의 출산영상은 별거 아니지만, 누군가가 프리패스 티켓을 사서 내 손에 꼭 쥐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할까. 그때 이후로 왠지 그 언니가 고마워 지금까지도 '아내의맛' 프로그램을 유튜브가 아닌 일반 방송분으로 시청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라 재방송 이지만..

2019년 12월, 2020년에는 임신을 해 볼까? 라는 계획을 드디어 남편과 세웠다. 거창할것도 없다.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 커플이기에, 앞으로 부부관계는 배란테스트기를 사용하고 체온도 매일매일 체크하자고 같이 공부해 보자고 했다. 남편도 본격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나는, 아마존에서 배란테스트기와 임신테스트기, 종이컵, 온도계, 비타민D, 엽산 등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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